기독교 형제단 7. (19세기의 영적 상황)
- 알림이
- 작성일2026.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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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영적 상황 – 부흥 운동의 여파; 복음주의의 확장
기독교형제단이 출현한 19세기의 영적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형제운동의 영적(종교적) 배경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분리주의 전통과 함께 형제운동 발생 직전의 영국국교회 내의 계파들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운동의 주역들은 분리주의 전통(비국교도)의 그룹들과 영국국교회에 속했던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의 종교적 상황은 18세기에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 영국국교회 내의 부흥운동으로 시작된 감리교운동, 그리고 모라비안과 침례교회의 윌리엄 캐리(William Carry) 등에 의해 확산 된 현대 선교운동 등의 흐름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주요 운동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독일 경건주의가 영국에 끼친 영향
18세기에 독일에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Pietism Movement)은 섬나라 영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경건주의는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을 교리로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실현되도록 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루터가 죽은 지 한두 세대 후에, 지도적인 루터교 신학자들은 종종 자연신학,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교리적 공식과 관련하여 극단적 세부사항들에 관한 교리적 논쟁을 포함하여 교리를 합리적으로 체계화하는 데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소위 개신교 스콜라주의(Protestant Scholasticism)라 합니다. 루터교 정통파는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정통교리 체계를 확립하는 데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기독교를 루터교 전통 내에서 적절한 세례, 예배 및 교리와 동일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교 내에서 교리적 논쟁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영에 의한 내적 변화의 진정한 체험의 관점에서 진정한 기독교를 추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올바른 믿음은 필연적으로 올바른 경험과 올바른 생활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들을 경건주의자들이라고 일컫는데, 경건주의의 근본은 진정한 기독교와 거짓 기독교, 또는 살아있는 기독교 신앙과 죽은 기독교 신앙 사이의 강한 구별과 가시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경건주의 운동은 영국에서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과 미국의 대각성 운동(1740년 이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경건주의는 사상 체계라기보다는 신학적 분위기와 자세, 그리고 진정한 종교의 마음가짐, 내적 확신과 평화, 감정의 강도, 경험을 중시하는 영성 운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경건주의 운동의 추진력은 기독교 진리의 내면화였습니다. 필립 야곱 스페너(Philip Jakob Spener, 1635-1705)는 기독교가 전적으로 “속사람 또는 새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내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은 자연스럽게 개인에 대한 강조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자아와 경험에 집중하였고, 개인에게 죄의 각성을 촉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초점과 함께 경건주의는 외적 권위와 제도적 장치에 대한 거부감을 가졌으며, 평신도 지향성을 나타냈고, 그리스도의 임재와 신자의 성품 변화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평신도 사역을 지향하고 제도를 거부하며,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삶을 중시하는 형제운동의 특징과 유사합니다. 일부 경건주의자들은 교회를 “살아있고 거룩하게 믿는 신자만을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했기 때문에, 영적인 생명력 없이 단지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구성원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기성교회 교제권에서 찾을 수 없다고 여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의 진정한 교제’를 개혁을 지향하는 ‘분파’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건주의가 영국으로 유입된 결과로 “진정한 원시 교회”를 이상과 규범으로 삼는 지향성이 18세기 초 영국의 여러 기독교 계파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피가 씨”라는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의 말을 근거로 일단의 사람들은 박해가 고대 교회에서 순결한 신앙을 나타내게 했고, 교회의 외형적 번영과 정치적 수용은 오히려 교회에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박해를 받았을 때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더 좋고 더 영광스러운 상태에 있었다”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각 시대에 일어났던 교회의 타락이 이 마지막 시대에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흥미롭게도 비개방형제단의 지도자인 다비의 “교회의 파멸” 개념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번 시리즈의 뒷 편에서 다시 논하겠습니다.
스페너는 “더이상 순결한 교회는 지상에 없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전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다”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오늘도 우리에게 바벨론이 있다”라고 인정하고 “왜 우리에게는 폐허가 되어도 바벨론과 구별되는 예루살렘이 있어서는 안 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다른 경건주의자 아우구스투스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는 “한 무리, 한 목자에 대한 성경의 약속이 양과 염소를 한 우리로 모으는 구실이 된다면 하나님의 교회를 바벨론으로 만드는 것”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경건주의 운동의 열정과 활력은 18세기 말에 다소 쇠퇴했지만, 몇몇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고, 19세기 초에는 부흥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국에서 발생한 형제운동의 주역들이 이전 시대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이 추구한 바와 매우 흡사한 형태의 교회론과 신자의 삶을 지향하였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형제단 역시 기독교 진리의 내면화를 추구하였고, 외적 권위와 제도적 장치에 대한 거부감을 가졌으며, 평신도들의 ‘사역의 자유’를 강조하였고, 그리스도의 임재와 신자의 성품 변화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구체적인 연결 고리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영국에 소개된 경건주의 신앙은 19세기 형제운동의 주역들에게도 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감리교운동이 형제운동에 미친 영향
감리교운동(Methodist Movement)은 18세기에 시작되어 정점에 올랐지만, 형제운동이 시작된 19세기 초에도 여전히 영국에서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감리교운동은 후에 존 웨슬리(John Wesley)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그 시작은 칼뱅주의자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와 아르미니안주의자 웨슬리가 함께한 홀리클럽이 그 모체가 된 영국국교회 내의 부흥운동이었습니다. 웨슬리는 아메리카로 항해하는 과정에서 모라비안 교도의 신앙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1738년 헤른후트(Herrnhut)와 마리엔보른(Marienborn)의 모라비안 공동체를 방문했습니다.
1738년 5월 런던의 엘더스게이트가(Aldersgate Street)에 있는 모라비안 모임에서 웨슬리는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마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변화를 설명하는 것을 듣고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웨슬리는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웨슬리는 경건주의자 스페너와 프랑케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정신을 실행하는 것에 있어서는 경건주의자들과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독일의 경건주의는 그 자체의 교파와 조직체를 형성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웨슬리는 개인이 스스로에게만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는 것과는 다른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즉 그는 ‘신도회’(society), ‘연회’(congregation), 그리고 ‘협회’(connexion) 등을 구성함으로써 그 운동을 조직화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영국국교회의 교인으로서 영국국교회의 고(高)교회적 교리와 행습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웨슬리의 ‘신도회’는 ‘형태를 갖추고 경건의 능력을 구하고, 함께 기도하고, 권고를 받고, 사랑으로 서로를 지켜보며, 서로 도와 구원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정의되었습니다. 웨슬리는 결코 별도의 교단을 창설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지만, 그는 모든 예배당과 신도회(society)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계승할 백 명의 설교자들의 체제를 만들었습니다(1784년).
웨슬리와 옥스퍼드의 홀리클럽에서 함께 활동했던 휫필드는 자유의지와 저항할 수 있는 은총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웨슬리의 본(本) 무리와 견해를 달리하는 칼뱅주의 감리교도의 작은 무리를 이끌었습니다. 휫필드는 그의 미국 식민지 전도 여행 중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친구가 되었고, 칼뱅주의적 감리교운동과 칼뱅주의적 부흥운동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휫필드는 토마스 아 캠피스(Thomas a Kempis)의 글과 윌리엄 로우(William Law, 1686-1761)의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위한 엄숙한 부르심」(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 1729)을 읽으면서 그의 영적 자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또한, 메튜 헨리(Matthew Henry)의 주석들을 참고하였고, 청교도인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의 「회개치 않은 자를 부르심」(Call to the Unconverted) 등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휫필드는 1735년에 ‘홀리클럽’(Holy Club)에 가입하여 웨슬리 형제(존과 찰스)와 교제하였습니다.
휫필드는 페터 레인(Fetter Lane) 공동체의 모라비안 회합에 참석하였으며 아이작 왓츠(Issac Watts)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하우엘 해리스(Howell Harris)를 비롯한 웨일즈의 부흥 설교자들의 본보기를 따라 휫필드는 1739년 2월 17일에 브리스톨 근처의 킹스우드(Kingswood)에서 자신의 첫 야외 설교를 하였고, 대중 복음화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1739년 8월 이후 휫필드와 웨슬리 사이에는 균열이 발생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신학적 차이가 동역을 지속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감리교운동의 대다수 회중은 웨슬리의 영향권 아래로 넘어갔고, 웨슬리가 주도하는 운동이 되었습니다. 1791년 웨슬리의 사후, 토론과 협상이 시작되어 1836년 영국국교회에서 감리교도가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19세기로 이어진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휫필드와 에드워즈의 칼뱅주의적 부류와 웨슬리파 감리교도의 유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유산의 첫째 요소는 전통 기독교 교리들을 지키고자 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모두 합리주의에 저항했으며, 세속 문화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 그 유산의 두 번째 요소는 경험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교리에 대한 단순한 명목상의 동의가 자동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지 않으며, 중생의 경험이 사람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며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초기 형제운동의 지향점과 상당히 일치하는데, 그들 역시 합리주의에 저항하고, 세속 문화를 거부하는 가운데 전통 교리를 지키고자 했고,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회심함으로 참 신자가 된 사람들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형제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생각하고 의도했던 것들은 그 이전 역사 가운데 이미 존재했던 개혁자들의 사상과 유사한 것이었고, 지향점이 같은 또 하나의 도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 영국국교회의 신학적 경향
형제단의 초기 구성원 중 다수는 영국국교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19세기 초의 영국국교회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은 관용의 시대에서 종교적 평등의 시대로 전환하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19세기에 영국을 휩쓴 회의적인 지적 흐름은 영국국교회에 세 계파를 발전시켰습니다. 그것들은 고(高)교회(The High Church), 저(低)교회(The Low Church), 그리고 광(廣)교회(The Broad Church)였습니다.
(1) 고(高)교회(The High Church)
형제운동의 주역이자, 후에 비개방형제단을 이끌게 된 다비는 옥스퍼드 대학과 관련이 깊고 옥스퍼드운동에서 일정 부분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종교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운동이었던 옥스퍼드운동은 그 최초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옥스퍼드 대학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그 운동은 또한 “소책자파 부흥”(Tracterian Revival)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영국국교회 내에서 가톨릭 신학의 부흥을 이끄는 소책자들(tracts)을 출판하여 강력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옥스퍼드운동은 오랫동안 교회가 국가의 한 부서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 왔던 사람들이 점차 교회가 그리스도에게서 말미암는 신성한 기관이며, 그 권위가 국가에 의해 부여된 것이 아니라 사도의 계승을 통해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는 개념을 강조하고 유포하였습니다. 옥스퍼드운동의 주창자들은 교회가 그 자체로 생명이 있으므로 책임을 수행하려면 외부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 저(低)교회(The Low Church)
고교회가 전례적인 지향점을 갖고 있었다면, 교회 예식보다 성경 내용과 복음에 초점을 맞춘 계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低)교회(The Low Church) 계파였습니다. 영국국교회의 복음주의자들은 저(低)교회로 불립니다.
감리교운동은 영국국교회 내뿐만 아니라 영국 사회에 신앙부흥의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초기 복음주의자들은 영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교구들에서 활발한 목회 활동을 했습니다. 클레팜에서 결집한 복음주의자들은 소위 클레팜 분파(Clapham Sect)를 이루었는데, 영국 사회개혁에 많은 평신도 지도자들을 공급하였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서 개인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들이도록 호소했습니다. 그것은 죄의 각성과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수용하는 회심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적 권위나 성례전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보다도 그들은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갖고 세상의 악과 약하고 무지하고 착취당하는 자들의 필요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1787년과 1850년 사이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된 대부분의 사회개혁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복음적 표출이었습니다. 대표적 복음주의자인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노예 해방을 위한 법안이 의회에 제출되고 통과되도록 하는 일에 기여했습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감리교운동과 함께 영국국교회를 떠났지만, 영국국교회 내에 머문 이들도 많았습니다. 토리당이 다시 집권하면서 복음주의자들은 영국국교회 내에서 위축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영국국교회 밖에서 그 대안을 찾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경향이 형제단의 출현에 일부 동력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형제운동의 지도자들 중에 그로브스나 다비와 같이 영국국교회 출신의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러한 맥락의 개연성을 증거 해 줍니다.
(3) 광(廣)교회(Broad Church)
영국국교회 내의 세 번째 부류는 영국국교회 교리의 기준에서 볼 때 가장 폭넓은 유연성을 가진 계파로 광(廣)교회라 일컫습니다. 대략 1830년에 시작된 광교회운동(Broad Church movement)은 영국국교회에서 사회적, 개방적 또는 현대적 요소를 대표합니다. 이 광교회주의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직관적인 의식과 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내재성을 강조했습니다. 반면 인간의 타락과 속죄는 무시하거나 최소화하였습니다. 광교회운동은 당시의 보수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에게 위기의식을 갖게 하였고, 그 위기의식은 보수적이고 종교개혁 전통을 지키려는 분파로 등장한 형제단이 출현하여 성장해 가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단은 그 초기부터 보수적이며 종교개혁 전통을 강하게 추구하였으며, 역사적으로 그 기조를 계속 유지하였습니다. 이는 합리주의에 회의를 느낀 사람들에게 대안을 제시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형제단이 성장하고 유지되는 데 있어서 주요한 요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by. 방기만 (서청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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