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형제단 6. (19세기의 시대적 상황)

  • 알림이
  • 작성일2026.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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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시대적 상황 낭만주의, 산업혁명



  어떤 운동이나 사상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듯 나타나지 않고, 특정 시대 상황의 인과관계에서 출현하기 마련입니다. 기독교 형제단의 출현에 대해서도 그 출현 시기인 19세기의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9세기의 시대적 상황을 대표하는 두 가지는 낭만주의와 산업혁명입니다.
 

1) 프랑스 대혁명
  프랑스 혁명은 계몽주의에 그 사상적 바탕을 두었던 세계사적 사건이었습니다. 18세기의 유럽은 이성(理性)을 인식의 주요 수단으로 삼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이성적 성찰로 비합리적인 모든 것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과 당시 프랑스의 고질적인 빈부격차와 기득권 세력의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대중의 반발이 맞물리며 혁명으로 파급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교회, 왕정으로 대표되는 기존 질서를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프랑스의 정치 체제뿐만 아니라, 유럽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 왔던 교회의 권위와 기독교적 체제에 치명적 손상을 주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로 대표되는 교회의 권위에 회의적 인식이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에 파급되었고, 이러한 생각은 가치 판단에 있어서 전통적인 기독교적 관점이 아니라 인간 이성을 통한 성찰을 더욱더 의지하는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유럽 사회, 특히 유럽의 군주들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에게 충격을 준 것은 혁명가들이 왕을 단두대에서 처형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 혁명의 파급을 두려워한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의 왕정국가들은 반()프랑스 연합을 형성했습니다. 이런 혼란을 틈타 1799년 프랑스에서는 엠마누엘 시에이스(Emmanuel Sieyes)와 나폴레옹(Napoleon)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획득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군사독재를 시행하였고, 180412월 황제로 등극하였습니다.
  초기 나폴레옹은 반()프랑스 연합군으로부터 프랑스를 방어하는 전쟁을 하였으나, 점차 타국을 침략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여 약 60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유럽을 전화 속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군대는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 날씨 가운데 참담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결국, 18141,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영국의 연합군은 나약해진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침공했고,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원로원에 의해 황제직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2) 낭만주의의 발생
  프랑스 혁명과 이어진 나폴레옹 전쟁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계몽사상을 확산시키기도 하였고, 또한, 계몽사상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무너지게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계몽사상에 의해 구시대의 권위와 가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경험을 함으로써 기대하게 한 측면이 있었는가 하면, 이어 일어난 전쟁의 참화는 유럽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측면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화(戰火) 속에 유럽인들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이기적인 존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이성보다는 자연 그대로 느껴지는 감성, 그리고 과거의 아름다움과 고요함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낭만주의 운동이 발생하였습니다.
  낭만주의는 형식과 구조 체계에 대항하며 자유와 역동성을 추구하는 사상적·문화적 경향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개성을 강조하고 독창성을 중시하였습니다.
또한, 이 시대에는 인쇄술의 발달로, 자국어로 된 출판물의 붐(boom)이 일었으며,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시행된 의무교육으로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활자 매체가 소통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당시까지 문학 작품에 대한 독자(소비자)가 특정 계층이었으나, 이제 대중이라는 다수가 독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유럽인들은 계몽주의적 가치 판단 기준이었던 분석적 추론과 과학적 실험보다 경험과 감정을 더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수학 공식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으나 슬픔의 정도와 형태는 개인에 따라 다른 것처럼, 사람들은 모든 인간의 보편성과 단일성의 개념에서 벗어나, 인간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낭만주의적 기조(基調) 아래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 지식이나 신학보다는 개인의 영적 체험이나 영적 역동성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3) 낭만주의와 기독교형제단 출현의 연관성
  독일의 낭만주의와 관념주의(idealism) 철학을 영국에 소개한 사람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입니다. 콜리지는 1798년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와 공동 시집을 출판하였는데, 이 시집은 고전주의로부터 독립한 낭만주의의 선언문으로 간주 되기도 합니다. 형제운동은 영국에서 기성 체제인 영국국교회와 그 체계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낭만주의가 기성 체제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교회사가 데이비드 베빙턴(David W. Bebbington)은 낭만주의가 19세기의 복음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19세기 초에 초월적 은사와 종말론을 중심으로 한 신앙 운동을 주도했고 형제단의 초기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이 콜리지를 개인적으로 알았고, 그로부터 낭만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으며, 형제단 내에 큰 영향을 미쳤던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도 낭만주의 사조의 영향 가운데서 형제운동을 주도하였다고 평가했습니다.
  형제단이 설립한 엠마오 성경대학(Emmaus Bible College) 교수를 역임한 마크 스티븐슨(Mark R. Stevenson)은 낭만주의적 기조가 형제단에 미친 영향은 다음의 네 가지 성향으로 나타났다고 보았습니다:
첫째, 신앙을 이성보다 더 높이 여기도록 하였다.
둘째, 성경의 권위와 충분성에 대한 확신을 낳았는데, 이와 관련해서 다소 신비적 경향이 있었다.
셋째, 하나님 백성을 불러내시는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였다.
넷째, 교회의 파멸 개념을 토대로 한 비관적 염세주의로 나타났다.
  실제로 형제단은 제도적 교회, 형식화된 교회 예전, 사람이 세운 질서와 계획을 벗어나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교회, 그리고 성령의 즉흥적 감동과 인도하심을 추구하였는데, 이러한 경향성은 다분히 낭만주의적 경향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형제운동은 낭만주의 사조에서 많은 양분을 얻었음이 분명합니다.
 

4) 산업혁명과 새로운 신앙운동에 대한 필요
  형제운동이 발생한 19세기 초 영국은 18세기부터 이어진 산업혁명(The Industrial Revolution)과 그로 인한 사회적 격변이 일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는 1760년부터 1840년까지 영국의 경제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 영국 경제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Arnold Toynbee, 1852-1883)에 의해 처음으로 대중화되었습니다. 이 변혁은 많은 사람을 농촌에서 도시로 이끌어서 그들에게 새로운 일과 삶의 방식을 수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생산 주체와 소비 주체가 겹치게 되었다. 이전까지 생산은 노예나 농노들의 몫이었고, 소비는 귀족들이나 상류층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으로 말미암아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겹치게 되었습니다. 하류층 사람들도 소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물질에 대한 욕구와 추구가 심화 되었고, 소비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도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익명의 개인들 역할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곧 대중의 발생입니다. 새롭게 형성된 사회 구조는 생존경쟁과 무자비한 이기주의, 그리고 효율성을 앞세운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인 경제 체제 속에 인간을 부품화하는 현상을 부추겼습니다. 이처럼 산업혁명은 물질과 경제 구조의 혁명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자본주의의 발전은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켰습니다. 수공업 사회에서는 각자가 가진 기술과 노동력으로 상품을 생산하였지만, 이제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그 자본으로 공장을 짓고 대량 생산하여 막대한 부를 창출 하였습니다. 반면에 자기 기술로 생계를 이뤘던 사람들이 공장의 생산 라인에서 한 부분의 단순한 일을 반복하는 단순 노동자로 전락하였고,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쉽게 대체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저임금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아동 노동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일반적으로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성인보다 훨씬 낮은 임금을 받아 가며 하루 십여 시간의 노동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이 거주하는 주거 형태도 말할 수 없이 열악했고, 산업화 된 도시마다 빈민들의 거주지인 슬럼가가 형성되었습니다. 비참한 노동자들의 삶을 목격한 지식인 중에는 사회 개혁적 대안을 내놓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와 그의 동료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맨체스터의 사업가)가 그런 인물들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1848년 런던에서 공산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을 출판하였는데, 기독교 복음에 매우 적대적인 유물론적 사상을 출현시켰습니다.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에 매료되었지만, 헤겔의 절대 존재를 유물론으로 대체했습니다. 그는 실재(reality)는 움직이는 물질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를 발생시키고, 그들을 압제하고 파괴하지만, 노동자 프롤레타리아가 일시적으로 독재하게 될 것이며, 이후 계급 없는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은 영적 세계와 천국 복음으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현실과 물질로 돌리게 하였습니다. 공산주의는 영국에서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지만, 당시 영국인들의 삶의 상황과 심적 상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영국인들은 사회적 격변과 가치의 혼돈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이처럼 형제운동이 일어난 19세기 초의 영국인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즉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변혁을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격변의 상황에서 기존 권위로부터의 이탈과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발생은 개인적이고 새로운 영성에 대한 갈증을 유발했고, 이러한 상황이 새로운 신앙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형제운동의 주역들은 소외된 고아들을 돌보고 후원하는 일에 직접 참여하였고, 성경의 미성취 예언의 사실성을 강조하였으며, 교회 전통이나 교리적 논의보다 개인적인 신앙체험과 실제적인 신앙의 삶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현실의 암울한 측면을 넘어설 수 있는 천국의 소망을 강조하였습니다.

 

by. 방기만 (서청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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